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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해하는 세상

노동의 탈상품화를 바라며..


   

요즘 쌍용자동차 노조의 투쟁과 이를 공권력으로 진압하려 했던 정부와 사측의 행동을 보며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일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굴뚝에 올라서 까지 파업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기사를 읽으며 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만든 문구는 "해고는 살인"이라는 피켓이었다. 쌍용자동차가 대량해고에 이르기까지 이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공장에서 기계 부속품처럼 자동차를 조립하던 노동자들이 아님에도 부실 경영의 책임은 노동자들이 모두 떠안은채 실업자가 되어야 한다. 회사에서 나오면 당장 먹여살려야 하는 가족이 있는 노동자들에게 계속 일을하여 그들이 노동착취를 당하던 말건 우선 일해야 하는 것자체가 중요하다는 그들의 절박함은 제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나의 마음을 참으로 서글프게 한다. 약자일 수 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현실과 이를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 그리고 이에 대해 냉담한 사회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영원토록 자본주의의 형태로 발전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맑스가 비판하길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는 자본에서 항상 소외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자본주의에서 필요로하는 상품은 오직 노동자들만이 생산하고 있지만 그 상품가치에서 나오는 이득은 노동자가 고스란히 가지지 못한다. 상품 생산에 필요한 자본, 원료, 기계 등은 모두 자본가에게 속한 것이며 여기서 노동자는 자본가의 자본에 의해서 구매된 노동력이란 상품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상품가치의 총 이득 중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더욱이 새로운 생산양식이 발명되어 보다 효율적으로 생산이 가능해질 수록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이득은 점점 줄어들고 자본가에게 돌아가는 이득은 점점 커지게 된다. 이렇게 생산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이 더욱 구조화되어 소수의 자본가에게만 자본이 축적되고 노동자는 더욱 가난해 진다. 맑스는 이러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이 고도화되면 노동자계급에 의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는 전복된다고 말한다.

맑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에서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고 그 역사의 발전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즉 철학 종교 문화와 같은 상부구조가 인간의 의식을 바꾸고 역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부구조인 물질에 대한 투쟁과 갈등이 인간의 의식을 바꾸고 역사의 변혁을 이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에 대한 투쟁은 항상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사이의 투쟁이었고 그 결말은 혁명으로 끝났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의 물질을 둘러싼 투쟁 또한 공산혁명으로 마무리 된다고 본 것이다. 특히 맑스의 유물론이 헤겔의 유물론과 다른 점은 역사의 혁명과정에서 인간의 실천적 의지를 중요하게 보았다는 점인데 때문에 맑스는 자본주의 모순이 심화되면 노동자들이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혁명을 위한 단결을 촉구하고 있다. 결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핵심은 인간 노동자들의 의지와 실천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엄밀히 보면 자본주의가 아무리 고도화되었어도 세계역사에서 공산주의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련의 10월 혁명도 중국의 공산혁명도 노동자들이 계급의식을 가지고 물질적 투쟁을 위해 일으킨 혁명이 아니었다. 소련과 중국의 공산화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되지고 않은 상태였고 물질적 투쟁이기 보다 정치적 이념적 투쟁으로 일어난 공산 혁명이었다. 그 이후의 공산국가들의 출현도 모두 소련이나 중국의 공산주의 확장을 위한 타의적 공산화에 불과했다. 때문에 역사속 공산주의국가들은 생산수단의 사회화나 노동의 집단화를 이룰 의지도 없었고 누구나 일하고 싶은 만큼 일하고 가지고 싶은 만큼 가질 수 있는 유토피아를 만들지 못했다. 반면 맑스가 얘기한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는 국가들은 정치적으로는 냉전시대의 매카시즘으로 노동자계급을 협박하고 경제적으로는 복지제도의 도입으로 자본주의의 모순된 생산양식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를 길들이고 혹은 함께 상생하는 법을 터득했다. 결국 맑스가 주장한 노동자들이 노동계급의 의식을 가지고 단결하여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항하는 혁명을 일으키지 못하고 자본주의는 그 질곡을 거듭하면서도 계속 이어지고 발전하고 있다.

문제는 그 자본주의의 발전이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앞날이 암울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근래에 자본이 완전한 자유를 얻기 이전의 케인즈주의시대에도 노동자의 자본으로 부터의 소외는 변함없었지만 국가의 자본통제가 어느정도 가능했고 미미했지만 국가가 정치적 목적에 의해 노동자와의 타협(복지발전)도 가능했다. 문제는 자본주의는 항상 좋을 수만은 없고 항상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국가의 만성적자와 통제 하에는 더 이상 자본주의의 팽창이 어렵게 되자 등장하게 된 것이 신자유주의이다. 완전한 자유를 얻게된 자본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모든 규제를 해체해 버렸다. 국가의 무역장벽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까지 말이다. 이익이 되는 곳이라면 자본은 세계의 어느 구석까지라도 국경을 넘어서 간다. 자본에 이익이 된다면 노동자의 삶은 상관없이 복지를 축소하고 노동자의 지위를 비정규직으로 바꾼다. 공기업은 민영화가 추진되어 시장에서 공공재의 공급까지 이윤창출 수단으로 된다. 자본들은 이러한 신자유주의가 시장의 비효율성을 제거하고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나아가 사람의 삶의 질을 높인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규제와 국경이 없는 자본이 세계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갔고 실업과 비정규직을 늘리고 양극화를 점점 심화시키고 있다. 자본은 장기적인 이윤을 보고 투자하기 보다 단발성 투기로 돈을 벌려고 하고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이를 부추기고 있다.

쌍용자동차사태를 보며 신자유주의 시대에 규제없는 외국자본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는가에 대해 강력한 의문을 품게 한다. 2004년 경영악화로 쌍용자동차는 매각절차에 들어가게 되는데 정부는 이를 외국자본에 넘어가는 일을 방관하게 된다. 어쩌면 국내 기업의 재벌화를 막는다는 생각으로 인수하는 것을 막았던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세계화 시대에 외국자본이 국내에 들어오는 것은 국내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짧은 생각으로 오판을 했을 수도 있다. 결국 쌍용자동차는 외국자본인 상하이자동차에게 넘어가게 되지만 외국자본은 애초에 회사의 성장이나 한국경제에 이바지 할 생각이 없었을런지 모른다. 상하이자동차는 쌍용을 인수하면서 매년 신차를 출시하기 위해 투자를 하겠다고 했지만 상하이자동차가 인수한 후에 쌍용의 주력모델은 여전히 무쏘와 체어맨이였다. 현대 기아는 신차들이 매년 쏟아져나오는데 쌍용자동차는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으니 경영이 더 악화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규제가 없는 외국자본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오직 그들의 이익에 종사할 뿐 그 나라 노동자의 삶과 그 나라의 경제는 고려하지 않는다. 상하이자동차는 결국 쌍용자동차에서 기술만 빼간채 커다란 부실기업과 수많은 실업자만 남긴채 떠나 버렸다.
 
쌍용자동차의 경영진들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구조조정을 하기로 하고 2,500여명의 노동자를 해고시키로 한다. 쌍용자동차 공장이 있던 평택은 실업자의 도시가 될 것이고 쌍용 노동자들로 먹고살던 주변의 상권들도 같이 망할 것이다. 해고된 노동자들과 구조조정에 몰린 노동자들은 공장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점거농성을 했지만 그 상황은 참으로 코메디와 같았다.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노동자들은 공장정상화를 위해 농성을 하고 구조조정에 몰린 혹은 해고된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반대를 위한 농성을 했다. 쌍용자동차 사태를 보며 勞勞갈등이란게 얼마나 처참한 광경인지 눈으로 보게 되었다. 자본주의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자들은 단결해야 한다던 맑스의 말이 무색해 졌다. 노동자와 노동자의 갈등은 신자유주의시대에 얼마나 노동자들이 단결할 생각도 못할 만큼 절박한 코너까지 몰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노동자들은 때때로 자본가들이 주장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수긍하여 살아가기도 하지만 자본가들이 얘기하는 그 지배 이데올로기가 모두 노동자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쌍용자동차의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노동자들은 경영진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기만 한다면 잘 될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공장밖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해고된 노동자들을 보며 자신들이 동료들을 내쫓고 살아남아 일하는 것이 그들의 현실에 정말 이익이 되는 것인지 고민을 해야 한다. 지금의 시대에서 우울한 모습은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나 연대감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회사에서 살아남은 노동자와 해고된 노동자 사이에 새로운 갈등이 생겨나고 고용된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노동자 계급내 균열이 생겨나고 있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일회용 상품을 쓰듯이 필요할 때 쓰고 버리는 일은 계속될지 모르고 그 일회용이라도 되기 위해 노동자들은 점점 고개를 숙이게 될까 겁이난다.

사실 앞으로 가장 겁이나는 것은 그러한 자본주의의 논리가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고 있는 사회 때문이다. 대학생들은 자신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하나의 상품으로 얼마나 사회에서 가치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까를 고민한다. 서점가의 책들은 자신의 상품가치를 어떻게 높일까에 대한 내용들로 홍수를 이루고 있다. 학점과 어학점수가 자신의 상품가치의 가격표라 여기고 이를 높이기 위해 고분분투를 한다. 여학생들은 외모도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는 일이므로 방학을 이용하여 성형수술을 하고 평소에 다이어트와 운동으로 몸매를 가꾼다. 취직하기 위해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이 자아성취를 위함인지 아니면 정글과 같은 자본주의에서 먹고 살기 위함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하지만 일을하고 있는 또 일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자본주의를 사는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이 사회에서 가치있는 상품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 자체를 바꿔야 한다 아니 버려야 한다. 개별 노동자들의 상품가치가 높다는 것은 경쟁을 더욱 부추기고 그 경쟁에서 더 높은 성장과 발전을 가져온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노동자는 상품이 아니라 인간이다.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벽돌과 같은 상품이라면 건물 지을 필요가 있을 때만 혹은 벽돌 값이 내려 갔을 때만 그 벽돌을 사서 건물을 지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벽돌과 같이 필요할 때 시장에서 쓰고 필요 없을 때 보관해 둘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 생존의 문제가 있는 만큼 시장에서 항상 써주지 않으면 인간은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또한 상품과 같이 가치를 높이기 위한 경쟁은 인간으로서 그 가치를 높이기에 한계가 있으므로 결국 높은 자신의 가치가 있음에도 낮은 가격으로 팔리기 위한 경쟁으로 격하된다. 상품으로서 노동자들은 서로 대체가능한 존재가 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노동력 공급과잉 시대에는 서로 비난하며 분열되고 스스로 파편화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뭉쳐지 않는 모래처럼 되고 만다.
 
이렇게 노동자의 상품화가 가속화되는 자본주의의 결말은 참으로 어둡다.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상품이라고 낮추고 인간의 정치적 권리까지 포기 한다면 물론 그렇게까지 가지는 않으리라 생각되지만 어쩌면 역사에서 반동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다. 노동자 스스로 상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시장 밖에서 머물고 있는 노동자들의 권리마저 빼았아 가고 종국에는 자신의 권리마져 반납하게 될지 모른다. 그 결과 어쩌면 자본주의는 발전하지만 민주주의는 후퇴하는 근대화이론의 가정을 역행하는 현실을 마주치게 될지 모른다. 쌍용자동차의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노동자들이 혹시 자신이 노동자로서 이 회사에 보기에 좀 더 나은 상품이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안도한다면 자신 또한 언젠가 더 나은 상품가치가 있는 노동자들에 의해 쫓겨날지 모르며 수요 공급 곡선이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시장에서 스스로 공급가격을 낮춰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노동자는 상품이 아니다. 노동자는 상품이 아닌 탈상품화되어야 한다는 애스핑앤더슨의 주장은 현재 자본주의에 대한 마지막 경고일지 모른다. 노동자가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 곡선에 따라 거래되는 상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권리가 있는 인간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또한 노동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당연한 권리로 봐야 하는 것이다. 애스핑엔더슨은 이러한 노동자의 탈상품화를 국가가 보장해야 하고 이를 복지와 같은 사회정책으로 해결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쌍용자동차 사태를 통해 노동자를 인간이 아닌 하나의 상품으로 보았을 때 얼마나 노동자들이 벼랑에 몰릴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쉽게 아무런 죄책감 없이 공권력으로 진압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는 것이 당연한 듯이 여기게 되는지를 지켜 보았다. 신자유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에 국가가 호혜적으로 먼저 나서서 노동자의 탈상품화를 보장해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도 긴 기다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탈상품화는 비단 노동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닌 국가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시장에서 소외된 상품으로서의 노동자가 넘쳐 난다면 그 때 국가가 이를 어떻게 관리해 줄 수 있는 가에 대한 대책은 지금 당장 노동자가 상품으로 시장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동자를 상품으로 보지 않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쌍용자동차 사태의 본질은 외국자본의 무책임함과 이를 방조한 국가의 무능력 그리고 이에 따른 책임을 노동자에게로만 전가하려는 자본가의 책임전가에 있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쌍용자동차들의 절박한 문구 만큼 상품으로 가치를 다한 노동자들을 시장 밖으로 떠밀고 그들을 사지로 모는 것 보다 그들을 상품이 아닌 인간으로 보고 사회적으로 그들의 권리와 생존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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