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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해하는 세상

지식의 한계와 지혜에 대한 동경..


아무리 외모가 뛰어나도 그 외모가 그 사람의 인격까지는 보장해 주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많이 배워 가방끈이 길고 지식이 많다고 그 사람의 지혜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배웠다는 사람이 비리를 저지르고 상식적인 판단조차 제대로 못해내는 것을 보면 참으로 화가 난다.

공부를 많이 하고 책을 많이 읽어 지식이 쌓여도 가끔 허무함을 느끼는 것은 내가 머리에 축적하고 있는 이 지식이 과연 나를 지혜롭게 해 줄 것인가에 대한 의문때문이다. 공부를 하면 사람을 똑똑하게 하고 사물과 사회를 바라보는 통찰을 주지만 과연 그것이 내 삶을 지혜롭게 만들어 줄지는 의문이다. 물론의 양질의 전화로 많은 지식이 지혜로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지식이 지혜를 주는지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식은 매우 유용하다. 무엇에 대해 아는 것은 조금이라도 손해를 덜 볼 수 있게하고 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보게 해 준다. 법에 대한 지식을 쌓아서 변호사가 되면 되고 회계에 대한 지식을 쌓아서 회계사가 되면 되고 학문에 대한 지식을 쌓아서 박사가 되면 된다. 작게는 주식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손해를 줄이고 주식 투자로 돈을 벌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은 우리의 삶에서 일종의 수단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지식의 욕구는 우리 내면의 풍요까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지식은 그 때 그 때 살아가기 위해 손해 보지 않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 같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하는 것도 어떠면 지혜보다 앞으로 돈 벌기 위해 지식을 쌓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지식이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을 구한다고 그 자식이 지혜롭고 내면이 풍요로운 사람이 될까? 부모님은 자식이 잘사는 모습을 보며 흡족할지 모르지만 때때로 자식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며 많이 배운 자식이 왜그럴까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하라고 지식을 쌓으라고 강요만했지 지혜롭게 살으라는 가르침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책을 펴낸다. 오늘 도서관에서 다음 주에 있을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나름 그 분야에서 오랫 동안 연구한 big name의 연구의 성과물이었다. 몰랐던 많은 사실을 알게 되고 새로운 주장과 시각에 도전을 받았다. 그 책은 민족국가의 탄생과 국제체제가 어떻게 변했는가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기존 근대화주의자들의 이론과 다른 새로운 시각이 었다. 그 책의 주장은 국제정치에서 현실주의자에게 새로운 근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책을 읽고 민족국가에 대해 적어도 1시간 이상 떠들 수 있는 지식을 갖게 되어 행복하다. 하지만 그게 내 내면을 더 풍요롭게 하고 나를 더 지혜롭게 만들었는가? 가끔은 지식이 많다는 유명한 학자들이 쓴 책과 글보다 살면서 깨닫게 된 교훈이 나를 더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대학원에서 학문적인 글만 읽기 이전에는 소설과 시집 그리고 에세이를 많이 읽었던 것은 지식보다 소설과 시집 그리고 에세이를 읽으면서 삶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모두 알고 사랑과 이별에 대해 느끼고 아름다움과 추함을 느껴보고 싶어서 였는지 모르겠다. 지식에 대한 욕구도 강하지만 삶의 진리와 지혜에 대한 동경은 지식과 다른 또 다른 나의 욕구일지도 모른다. 중국의 사기, 초한지, 삼국지까지 밑줄까지 그어가며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던 적이 있다. 역사에서 지혜를 구해 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가끔 현재 사회에 정치에 일어나는 일을 보며 삼국지에서 나오는 상황과 비교하는 것이 버릇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책들에서 배운 것은 어떤 인물을 동경하느냐에 따라 지혜보다도 세상에서의 처세일 수도 있다. 유명한 사람들의 자서전이라면 꼭 찾아서 읽기도 했다. 그 사람들의 삶에서 감동도 느끼고 공감도 할 수 있었지만 지난 일에 대한 회상과 일상에서의 느낌에 대한 글들은 내 삶의 지혜와 가치에 대해 명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문학적인 정취란 매력적인 것이지만 창조적 예술로 삶을 보여주어도 삶을 극복해 주지는 않았다.




지혜가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았다. 따지고 보면 지식보다 무엇인가 무거워 보이고 심오하고 철학적인 것으로 보인다. 지식은 보통 과학이란 이름으로 포장을 많이 한다. 객관적이고 방법론적으로도 명확해야 하기 떄문이다. 하지만 지혜는 무엇으로 얘기해야 할까? 지혜의 모습은 과학보다는 형이상학적인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너무 추상적일까?

지혜를 구하는게 소크라테스는 행복(Eudaimonia)의 추구라고 했다. 지혜를 위해 성경에서는 사랑을 가르치고 공자는 중용을 말한다. 내가 배우고 있는 학문에는 유행이란 것이 있다. 행태주의 정치학이 흥하기도 하고 제도주의 정치학이 흥하기도 하고 양적 연구방법이 정치학을 휩쓸기도 한다. 많은 이론들이 만들어지고 용도폐기되기도 하고 또 학자들도 그와 함께 새로운 책들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절대적 진리란 말은 무서운 집착일 수 있으나 난 그 때 그 때의 지식보다 오래된 도서관의 대리석 머릿돌에 영원히 새겨져 있을 것 같은 지혜를 사랑하고 싶다.

매일매일 아침에 눈을 뜨고 살지만 이런 반복적인 삶에 생각없이 흘러가는 일상이 되는 것이 참으로 무섭다. 일상에 살며 매일 밥을 세끼를 꼬박 꼬박 먹고 오후에 나른해 지면 커피를 마시고 집에와서 음악을 듣는 것.. 오늘 문득 이런 일상성에 지혜에 대한 동경이 은폐되어 버릴까봐 두려워졌다. 지혜가 무엇인지 내가 살면서 끝까지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멈추면 안되겠다는 생각이다. 아직은 지혜란 어쩌면 나에게 윤리적인 것일 수도 있고 신앙적인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방향만 있을 뿐이다. 지혜가 무엇인가에 대해 여기서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지식을 위한 공부만 일상적으로 하다 보니 지혜가 무엇인지 잠깐 망각한 나에게 반성의 의미로 이 글을 써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