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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끼는 시

돼지들에게 - 최영미



돼지의 변신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 
그는 여우가 되었다 

그는 워낙 작고 소심한 돼지였는데 
어느 화창한 봄날, 감옥을 나온 뒤 
사람들이 그를 높이 쳐다보면서 
어떻게 그 긴 겨울을 견디었냐고 우러러보면서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졌다 

그는 자신이 실제보다 돋보이는 각도를 알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 방향으로) 몸을 틀고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무슨 말을 하면 학생들이 좋아할까? 
어떻게 청중을 감동시킬까? 
박수가 터질 시간을 미리 연구하는 
머릿속은 온갖 속된 욕망과 계산들로 복잡하지만 
카메라 앞에선 우주의 고뇌를 혼자 짊어진 듯 심각해지는 

냄새나는 돼지 중의 돼지를 
하늘에서 내려온 선비로 모시며 

언제까지나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고 또 찬미하리라. 
앞으로도 이 나라는 그를 닮은 여우들 차지라는 
변치 않을 오래된 역설이...... 나는 슬프다.

 

 

 

돼지의 본질


그는 자신이 돼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훌륭한 양의 모범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신분이 높고 고상한 돼지일수록 이런 착각을 잘한다.

그는 진주를 한번 보고 싶었을 뿐,
두번 세번 보고 싶었을 뿐.....
만질 생각은 없었다고
해칠 의도는 더더군다나 없었다고
자신은 오히려 진주를 보호하러 왔다고.....

그러나 그는 결국 돼지가 된다.
그들은 모두 돼지가 되었다.

 

 

 

하늘에서 내려 온 여우


세계를 해석하는 입들은 지치지도 않네.
마이크 앞에서 짖어대는
늙고 노회한 여우와
그를 따르는 어리고 단순한 개들.

善을 말하는 입은 惡을 말하는 입보다 삐뚤어지기 쉬우니,

기름기 흐르는 입술로 아름다운 말들로
대중을 속이는 당신.
박수소리에 도취해, 자신의 위대함에 속아
스스로에게도 정직하지 못한 예언자.

겸손한 문체로 익명의 다수에게 다정한 편지를 띄우지만,
당신처럼 오만한 인간을 나는 알지 못하지.
당신보다 차가운 심장을 나는 보지 못했어.

계산된 ‘따뜻’에 농락당했던 바보가 탄식한다.
늦었지만,
순진을 벗게 해줘서 고마워.
선생님. 

 


 

비극의 시작

 

진짜 진주는 자신이 진주임을 모른다

 

뭇 구슬들이 시기하고

뭇 돼지들이 탐하는 보석,

진주는 자신의 빛나는 몸을 가리는 외투가 없다

 

자신을 보호할 껍데기가 없는 진주는

심심한 돼지와 한가한 여우들이 즐기는 간식.

 

돼지들의 노리개가 되지 않기 위해 산으로 들어간 진주는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 년이 못 되어

자신의 단단한 성이 답답했다

 

깊은 산중에서 혼자 지내다 병에 걸린 진주는

도시로 나왔다. 하룻밤 잘 곳이 없어 찾아간 진주를

하나뿐인 친구는 병원 냄새가 난다며 밖으로 내쫓았다

밖은 찬바람 이는 겨울,

 

붕대를 맨 진주의 손에서 피가 흘렀다

믿었던 친구에게 버림받은 그날 저녁,

진주는 여우를 만났다

 

 

 

돼지들에게

 

언젠가 몹시 피곤한 오후
돼지에게 진주를 준 적이있다.

 

좋아라 날뛰며 그는 다른 돼지들에게 뛰어가 
진주가 내 것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하나 그건 금이 간 진주.
그는 모른다
내 서랍 속엔 더 맑고 흠 없는 진주가 잠자고 있으니

 

외딴 섬 한적한 해변에 세워진 우리 집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내 방의 장롱 깊은 곳에는
내가 태어나 바다의 신비를 닮은
날씨에 따라 빛과 색깔이 변하는 크고 작은 구슬이
천 개쯤 꿰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가진 건 
시장에 내다 팔지도 못할 못난이 진주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나 쓰이라지
떠들기 좋아하는 돼지들의 술안주로나 씹히라지

언제 어디서였는지 나는 잊었다
언젠가 몹시 흐리고 피곤한 오후
비를 피하려 들어간 오두막에서
우연히 만난 돼지에게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나도 몰래 진주를 주었다
앞이 안 보일 만큼 어두웠기에
나는 그가 돼지인지도 몰랐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 주머니가 털렸다는 것만 희미하게 알아챘을 뿐

 

그 날 이후 열마리의 배고픈 돼지들이 달려들어
내게 진주를 달라고 외쳐댔다.
내가 못 들은 척 외면하면
그들은 내가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우리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진주를 줘 내게도 진주를 줘 진주를 내놔."
정중하게 간청하다 뻔뻔스레 요구했다.
나는 또 마지못해, 지겨워서,
그들의 고함소리에 이웃의 잠이 깰까 두려워
어느 낯선 돼지에게 진주를 주었다.
(예전 보다 못생긴 진주였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스무 마리의  살찐 돼지들이 대문 앞에 나타났다.
늑대와 여우를 데리고 사나운 짐승의 무리들이 담을 넘어
마당의 꽃밭을 짓밟고 화분을 엎고,
내가 아끼는 봉선화의 여린 가지를 꺽었다.
어떤 놈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주인 없는 꽃밭에서춤추고 노래했다.
그리고 힘센 돼지들이 앞장서서 부엌문을 부수고 들어와
비 오는 날을 대비해 내가 비축해놓은 빵을 뜯고 포도주를 비웠다.
달콤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며, 파티는 계속 되었다
어린 늑대들은 잔인했고,
세상사에 통달한 늙은 여우들은 교활했다.

 

나의 소중한 보물을 지키기 위해 나는 피 흘리면 싸웠다
때로 싸우고 땔 타협했다.
두 개를 달라면 하나만 주고,
속이 빈 가짜 진주목걸이로 그를 속였다.
그래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도망쳤다.
나는 멀리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갔다.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기차를 타고 배에 올랐다.
그들이 보낸 편지를 찢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그 탐욕스런 돼지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늙고 병들어,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는데
그들은 내게 진주를 달라고
마지막으로 제발 한 번만 달라고....  




20대 초반 "서른 잔치는 끝났다"란 최영미 시인의 시집을 읽고 나도 빨리 삼십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바램을 가졌던 적이 있다.

뭐가 뭔지 모르고 젊음만 있던 시절, 난 최영미 시인의 시를 읽으며 이러한 세상과 사랑과 자신에 대한 성찰은 서른살이 되면 모두 가지게 되는 줄 알았다.

내 나이가 벌써 서른이 넘었지만 과연 20대 초반 내가 꿈꾸던 그 30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최영미 시인의 시는 다른 시인들과는 다른 매력이 있기에 늘 가까이 두고 읽는다.

사회를 비판하는 시는 많아도 겉멋 없이 드러내놓고 날것으로 읽히는 시는 찾아 볼 수 없다.

사랑에 대한 시는 많아도 이별을 노래하는 시는 많아도 특별한 꾸밈이 없이도 나의 일기를 펼쳐 놓은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오는 시는 그리 많지가 않다.

그래서 최영미 시인의 시는 뭔가 특별한 것 같다.

얼마전 최영미 시인의 "돼지들에게" 시집을 다시 읽었다.

정치에 대한 정치인에 대한 실망감이 큰 요즘 인간의 권력이나 탐욕이 얼마나 순수함을 짓밟고 있는지, 우리는 또 얼마나 그 순수함을 뺏기고 돼지와 여우들에게 농락당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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